대학사계

나는 출석을 잘 부르지 않는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지각생이나 결석생을 가려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비싼 등록금 내고 강의에 빠진다면 그만큼 덜 배우니 본인만 손해다. 수업에 충실하지 못하니까 성적도 좋게 나올 리 없다. 스스로 대가를 치르며 수업을 빠진 것인데 뭐가 미진하다고 출석을 불러 추가로 점수를 깎고 난리인가. 비 갠 오월 아침, 빽빽하게 찬 대형 강의실 한 구석에서 조는 대신 한적한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재즈와 커피를 결합하는 한 번쯤의 일탈은 건강한 자기애의 표현일 수 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 바라보며’ 나 자신 말고 또 사랑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겠다면 어지간해서 말리기 어렵다.

나도 출석을 어쩌다 한번은 부른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학생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나는 한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으니 길가다 마주치면 인사하세요.’ 라는 말을 덧붙인다. 학생들은 길에서 교수를 만나면 인사를 할까, 그냥 지나칠까 망설일 때가 많다. 별로 안 친한 교수인 경우 그냥 모르는 체하고 넘어가기 쉬운데, 그런 분일수록 자주 만난다. 그런데 출석을 부르며 한번씩 눈을 마주쳐 놓으면 학생들은 조금 편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해본다. 사실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편이다. 더구나 한 학기에 만나는 수백 명의 수강생을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그렇게 이름을 한번 불러보면 기분이 좋다. 배움은 나눔이다. 서로 인사 한번은 나누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 나쁠 것 없다.

대학은 자유의 공간이다. 그리고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대학에서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의 이전을 넘어선다. 주어진 문제에 새로운 해답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져 지식의 지평을 넓히기도 한다. 따라서 대학 교육은 전문성과 아울러 창의성을 기르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독창적 사고를 하려면 기존의 틀을 깨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때로는 해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려면 교수건 학생이건 한없이 자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대학이 발전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규칙과 규율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하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도록 대학의 주인공들을 풀어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학 공간은 자율이 아닌 타율이 지배하는 영역이 의외로 크다. 일반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뭘 하게끔 유도할 때는 유인을 제공하고, 뭘 하지 못하게 강제할 때에는 규제를 사용한다. 그런데 규제는 그 획일성이 초래하는 비효율과 불공정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대학이 좋은 졸업생과 연구 업적을 배출하면 학생 및 연구 당사자에게 이로운 것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하는 기업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혜택을 받는다. 따라서 교육과 연구는 유인을 제공해서 이를 장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자유로운 교육 및 연구활동을 억제하는 규제는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 서 보면 좀 가만히 놔두어도 될 텐데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제약하는 사례가 많다. 입시나 학사관련 제도의 경우 대학 스스로 결정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정부가 획일적으로 규제를 하는 경우가 있다. 또 한번 만들어진 규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담당 공무원에게 물어보면 자신이 담당하는 제도나 정책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대겠지만,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그것이 맞는 답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정부 조직이야 관료적인 성향이 높다 보니 정책의 유연성이 떨어지기 쉽다. 하지만 대학 스스로가 경직적인 사고나 관행의 덫에 빠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비록 정부 통제의 수준이 선진국 대학들에 비해 높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만큼 자율적인 조직을 찾기는 어렵다. 그만큼 대학의 자체적 노력에 따라 연구와 교육의 경쟁력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끔 대학 행정이 정부 행정보다도 더 관료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같은 대규모 조직이지만 정부나 대기업은 한시도 놔두질 않고 누군가가 감시를 하는데 비해 대학은 그런 견제 기능이 약한 편이다. 아마 교육과 연구의 질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굳이 다른 제도적 감시 장치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대학의 경쟁력은 대학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육과 연구를 방해하는 규제는 줄이고, 이를 장려하는 유인은 늘리는 것이 우선순위이다. 그러려면 현장에 있는 학생과 교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매 학기 초만 되면 학생들은 곤혹스럽다. 수강신청 기간 내내 컴퓨터 앞에서 전쟁을 벌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교수에게서 듣기가 쉽지 않다. 수요가 많은 과목의 경우 강의가 대형화 되거나 강제로 분반이 되기 십상이다. 이래저래 학생들은 만족도가 떨어지는 수업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과목을 다양하게 늘려주고 좋은 교수를 더 많이 뽑는 일일 것이다. 이것이 당장 힘들다면 다른 대안도 있다. 예컨대 추가 연구비와 같은 유인을 제공하면서 수요가 많은 교수의 강좌 수를 늘릴 수도 있고, 이 강의를 대형강의로 만들되 강의 조교를 대폭 지원해 학생들의 불편함을 덜어 줄 수도 있다. 행정 직원이야 좀 귀찮겠지만 그렇게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이런 학생 위주의 제도 개선을 하려면 주어진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실제 수요부터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실은 싸늘하다. 그저 지난 학기 기준으로 수강 인원을 미리 정해놓고 여기에 모든 것을 맞춘다. 지난 학기엔 당연히 지지난 학기를 기준으로 했을 것이다. 규제의 획일성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매 학기 말이 되면 교수들은 곤혹스럽다. 상대평가 기준에 의해 성적을 주기 때문이다.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요즘같이 취업하기 어려운 시절에 제자들을 성적이라도 잘 줘 내보내고 싶은 것이 대다수 교수의 마음이다. 학점 인플레이션이 어떻고 말하지만 다른 데서 성적을 잘 주는데 내 자식만 차별한다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대학교의 학점 제도가 기본적인 ‘Pass-fail’ 수준 이상의 평가기능을 하기 어렵게 된 지 오래라고 생각한다. 모든 학교의 모든 수업에서 학생들을 실제 성적에 비례해 A+에서 D-까지 12등급으로 철저하게 강제배분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차피 이 제도는 왜곡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 곳에서 학점을 상향 조정하면 다른 곳에서도 따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과정이 어수선하게 반복되면서 학점 제도는 형편없이 불공정한 제도로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방식은 가급적 교수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예컨대 나 같으면 크게 A와 그 이하의 학점을 구분하는 선을 내가 정한 절대평가 기준에 맡길 것이다. A의 비중이 40%건, 50%건, 이 정도면 내 마음이 편하다 싶은 지점에서 A와 B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건 아니다 하는 학생에게는 C를 주면 된다. 나는 이런 방식이 기존 제도보다 훨씬 덜 왜곡적이고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간발의 차이밖에 안 되는 시험성적을 놓고 소영이는 A-를 주고 동건이는 B+를 준다는 게 나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다. 밖에서 보면 한 명은 A급이고 다른 한 명은 B급으로 볼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갈라놓긴 하지만 마치 부부를 생이별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는 예일대에서 가르칠 때도 A 학점을 남발했었다(40%!). 사실 당시 다른 교수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학교도 교수들의 자율을 최대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귀국해서 첫 학기 학점을 주면서 우리나라 대학들의 엄격한 상대평가 기준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었다. 나는 학교에 사유서를 써가면서 나의 ‘절대평가’ 기준을 사수하려 했고, 학교 간부들에게도 상대평가 제도를 완화해 달라고 틈나는 대로 읍소했다. 내가 별나게 행동하니 하루는 당시 교무처장이 날 따로 불러 설득을 하려 했다. ‘절대평가를 하면 실력 없는 교수일수록 A학점을 남발하게 되고, 학생들은 쉽게 학점을 따려고 질 낮은 강의를 듣게 된다’는 논리였다. ‘학생들에게 A 학점을 좀 가려서 줘야 그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당한 말씀이다. 단, 기존 제도의 틀에서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좀 달랐지만 아쉬운 소리 할 때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제일인지라 ‘가뜩이나 여자라고 차별받는 우리 학생들을 학점까지 짜게 줘서 취업전선에서 내보내면 너무 가엽지 않느냐고’ 매달렸다.

내가 다른 교수들보다 학생을 아끼는 마음이 더 커서 상대평가를 반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학처럼 성숙한 이성을 강조하는 집단에서 별 효과도 없는 규제나 통제를 관행처럼 유지하면서 불공정한 결과를 낳는 모습이 안타까워 그러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기르는 데 초점을 두어야지, 평가에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굳이 사람을 평가하려면 기준이 공정해야 한다.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내면 안 된다’는 법의 정의 못지 않게 교육 현장의 평가는 학생들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어차피 성적에 따른 차별이야 불가피하지만, 못한 학생에게 벌을 주기보다 잘한 학생에게 상을 주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다.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으로 A 학점을 주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학생들을 세세하게 평가해 구분한다. 같은 A학점을 주었더라도 최종 성적 95점으로 1등을 받은 학생과 80점으로 30등을 한 학생 간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나중 유학이나 취업 관련 추천서를 써주거나, 내가 데리고 쓸 인턴을 뽑을 때는 당연히 이런 절대평가 기준을 참고로 한다. 학점을 교수 자율에 맡기면 실력은 없으면서 성적만 잘 주는 교수에게 학생들이 몰린다 걱정하는데, 이것이 뭐가 큰 문제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비싼 등록금 내고 좋은 강의를 들을지, 좋은 성적을 받을지 정도는 학생에게 맡겨두면 되는 일 아닌가. 어차피 학점이 평가기능을 상실한 상태라면 사회에서도 다른 기준으로 졸업생의 자질을 판별하려 할 것이다. 학교 차원에서는 강의 평가나 다른 방식 등을 통해 교수들에 대한 평가를 철저히 하면 될 일이다.   

상대평가 제도보다 더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재수강과 관련된 규제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들은 재수강을 신청할 수 있는 학점을 C+ 이하로 제한 하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학점도 예컨대, A- 식으로 상한을 정한다. 나는 이것은 기본권 침해에 가까운 불공정 사례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B가 많은 학생에게는 이 학점들을 안고 가라 하고, 공부를 못해 C가 많은 학생에게만 패자부활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인가. 졸업이 좀 늦어지더라도 학점 세탁을 해서 성적 평점을 높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관행이라면 모든 학생에게 같은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 나 같으면 어떤 성적이든 재수강을 할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받을 수 있는 학점의 제한도 없앨 것이다. 단, 한 학생이 졸업 이전에 쓸 수 있는 재수강 카드를 몇 개로 제한해 스스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A-를 받은 학생이 성적이 더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 A+를 받기 위해 재도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지금 제도보다 훨씬 더 공정하다.  

학교에서 정한 평가 제도와는 별개로 교수의 자율적 판단이 학생의 후생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예로, 나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교수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팀플’이라 부르는 집단 평가 방식을 우리나라 강의실에서 쓰는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럿이 토론하며 공부하는 것은 당연히 장려할 필요가 있지만, 팀별로 성적을 주는 것은 공정성을 해치는 위험한 방식이 될 수 있다. 팀을 공정하게 구성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한 팀 내에서의 공헌도를 차별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교육은 훈련이고 연습이다. 소규모 토론에 익숙하지 않는 우리 학생들에게 그런 방식을 익히게 유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팀 작업에 열심히 참여한 학생은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우므로 혜택을 받는다. 그런데 이 학생이 게으른 나머지 팀원 때문에 나쁜 성적을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학교는 군대가 아니다. 그저 외국서 시행하는 제도라면 무슨 대단한 금과옥조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는 얘기다.

이외에도 조금만 학생 입장에서 생각하면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그저 수업 일수 채우고, 시험 보고, 성적 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나라 대학의 시험 기간이 왜 이렇게 짧은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예전 아날로그 시절에는 그나마 일주일 정도 되던 시험기간이 행정 전산화가 되면서 요즘은 더 짧아졌다. 사실 시험 기간 이전 한 주 정도는 수업을 하지 말고 학생들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줘야 한다. 아무리 놀기 좋아하는 학생도 시험 때는 공부를 한다. 이런 ‘Reading period’를 정해주면 자연 학생들의 학습 성취도가 높아질 것이다. 굳이 외국 제도를 도입하려면 이런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저런 긴 얘기를 했지만 내 주장이 무조건 다 옳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른 견해도 있을 것이고, 우리 같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영이나 행정상의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육은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것이 대학 발전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대학이 자유의 공간이라면 그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잡아 줘야 한다. 이는 대학 당국의 몫이다. 물론 자유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른다. 이는 교수와 학생이 갖추어야 할 상식이다.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이 모든 것에 앞서야 한다는, 그런 상식 말이다 (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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